커리어심리학연구소 :: (TED) 에이미 멀린스 : 역경의 기회

유의어 사전에서는 "장애"의 유의어로 "쓸모없는"이나 "불구" 를 들고 있지만, 신기원을 이룬 육상선수 에이미 멀린스는 장애의 정의를 다시 쓰고 있다. 정강이뼈 없이 태어난 역경을 딛고, 장애와 관련된 수식어를 극복하고 있는 그녀는 역경이 개개인의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내는지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





에이미 멀린스 : 역경의 기회

몇 달전 제가 이탈리아판 Wired지를 위해 기사를 쓰면서 한가지 느낀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나 무언가 글을 쓸때는 늘 유의어사전을 옆에 두곤 하는데요. 기사 교정을 막 끝내면서 제가 평생 사전에서 "장애"라는 단어의 뜻을 단 한번도 찾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전의 정의를 한번 읽어볼께요. "장애": 형용사- 불구의, 약한, 쓸모없는, 망가진, 막막한, 불구의, 부상을 입은, 짓이겨진, 변변찮은, 훼손된, 쇠퇴한, 낡은, 약화된, 무력한, 힘을 빼앗긴, 마비된, 장애가 있는, 노망한, 노쇠한, 병으로 누운, 녹초가 되어, 몹시 지친, 바닥난, 쇠약한, 소외된; 또는 아픈, 쓸모없는, 약한. 반대말은 건강한, 강한, 유능한. 전 친구에게 이 정의를 읽어주면서 처음에는 너무 황당해서 웃었는데, ‘짓이기다’를 읽는 순간에 목이 메였고, 이런 단어들의 폭력성에서 받은 심리적 충격을 참기 위해서 읽는 것을 멈출 수 밖에 없었어요.

물론, 낡고 오래된 사전이라 '그래. 굉장히 오래전에 나온 사전이라 그런걸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사전은 80년대 초반에 출판된 것이었어요. 그 때는 제가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 무렵으로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벗어나 다른 아이들과 제 주위의 사회에 적응하던 시기이지요. 제가 이 사전을 그 때 쓰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에요. 이 사전의 정의대로라면, 이세상에서 저같은 사람은 장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지금의 저는 제 인생을 통해 얻어낸 성공과 모험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2009년 인터넷 버전의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뭔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나 해서요. 수정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안타깝지만, 별로 나아진 게 없네요. 반댓말 중에서 마지막 두 단어가 특히 거슬리는데, "온전한" 과 "건강한" 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단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단어들로 불리워질 사람들에 대해서 갖게 되는 선입견과 그 단어에 감추어진 의미와, 왜 그런 의미들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언어는 우리의 사고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와 로마 등의 고대 사회에서는 저주도 입밖으로 내서 말로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고 믿었는데요. 말로 표현하여 외치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 것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걸까요. 무능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능력이 많은 사람일까요. 무심코 누군가를 '어린아이'라고 단순히 이름 붙이고는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잠재력을 구속하고 억누르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지 않고 아이들에 좀 더 많은 기회를 줄 수는 없는 걸까요?

어릴 적 저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분이 계셨어요.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있는 듀퐁 연구소의 의사선생님이었는데요. 그분의 이름은 피주틸로 선생님이십니다. 이태리계 미국인이셨는데, 이름이, 보다시피 대부분 미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보니, P선생님으로 불렀지요. P선생님은 언제나 화려한 나비 넥타이를 메고 다녔고 아이들을 다루는 데에 대단한 소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지내는 것을 정말 좋아했지만 물리치료 시간 만큼은 무척 싫어했습니다. 재활운동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거든요. 여러가지 색깔의 두꺼운 고무 밴드를 차고 말이죠. 제 다리 근육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 이 밴드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어요. 싫어서, 욕이 나올 정도였어요. 정말 싫었죠. 겨우 5살이었지만, 재활운동을 빼먹을 방법이 없는지 P선생님과 흥정을 할 정도였어요. 물론 성공적이진 못했지만요.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제 훈련때 오셔서 -- 철저하고 엄격했던 그 훈련에서요 -- 저에게 말씀하시길, "이야, 에이미, 넌 정말 강하고, 힘이 넘치는 소녀로구나, 내 생각엔 너 이 밴드 하나쯤은 끊어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만약에 이걸 끊어뜨리면, 내가 너한테 100달러를 주마."

지금에야, 물론, 이건 P선생님이 제가 하기 싫어하는 훈련을 시키게 하려는 일종의 계략이었지만 2층 병동의 5살짜리 중에 가장 부자가 될 가능성을 뒤로 하고 하지만 그가 저에게 그렇게 함으로써, 매일 반복된 끔찍했던 훈련을 저로 하여금 새롭고 기대되는 경험으로 변화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저를 대하는 그의 시각과 저를 강하고 힘이 넘치는 소녀라고 불렀던 한마디 덕분에 제 자신의 태도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강하고 힘이 넘치고 장래에 어엿한 운동선수가 되리라고 말이죠.

이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잠재력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나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지만, 이런 동의어 목록의 사례들로 보면, 우리 언어들은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현실로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사회의 변화를 쫒아가지 못해 왔습니다. 기술발전에서 생기는 수많은 변화들 말이죠. 의학적인 관점에선 제 의족, 라식수술이나 노쇠한 몸을 대체할 티타늄 무릎과 골반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도우며 자연이 만든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소셜네트워킹 플랫폼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아를 만들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려서 스스로 선택한 집단에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아마도 기술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만고불변의 진리는 바로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희귀하고 강력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적응력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정말 흥미로운 것이지요. 사람들은 역경의 극복을 주제로 저와 끊임없이 이야기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여기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표현은 저에겐 전혀 맞지 않고, 그런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 할 때마다 늘 불편한 감정이었어요. 그리고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역경을 극복한다는 구절에 숨겨진 의미는 성공이라던가, 행복이라는 개념이 담겨있고 고된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만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고 마치 제 인생에서의 성공이 어떤 능력에서 온 것 처럼 여긴다는 것이죠. 의족이나 저의 장애때문에 생길 수 있는 위험들을 회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제 변했습니다. 도전을 통해 우리는 달라졌어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혹은 두 경우 모두의 도전을 통해서요. 그리고 전 역경도 꽤 괜찮은 거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역경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닙니다. 역경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저의 그림자인 것 처럼 생각합니다. 어떨땐 잘 보이고, 어떨땐 잘 보이지도 않지만 늘 저를 따라 다닙니다. 그렇다고, 투쟁의 압박감과 부담을 폄하하려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역경이기도 하고, 도전이기도 하고 모든 개개인들마다 상대적인 것이죠. 문제는 역경을 마주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단순히 그들을 역경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맞이할 수 있게 준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뭔가에 적응할 준비를 하도록 하려면 그 아이들을 모질게 대하곤 하잖아요. 자 여기 중요한 차이점과 특징이 있습니다. 제가 다리가 없다는 객관적인 의학 소견과 제가 불구냐 아니냐 하는 사회의 주관적 견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솔직히, 제가 직면했어야 했던 유일한 장애는 저를 이런 사전적 정의들로 묘사하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보호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의학적 예후에 관한 냉정하고 믿기 힘든 진실을 알려줄 때나 혹은, 정말로, 의학적 소견에서 예상되는 그들의 삶의 질을 알릴 때 진정으로 불구자로 내몰 수도 있는 벽을 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만 찾으려 하고 그 증상 자체보다 치료방법이나 얼마나 장애요인이 될것인지만 판단하다보면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그들의 잠재력을 묵살하게 되어서 우리는 그들의 선천적인 시련 위에 더한 고통을 안겨 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기여를 할 수 있나 점수를 매기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그 병적인 측면보다는 개인 역량의 범위를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건,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들과 우리의 위대한 창조적 능력은 동반자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무언가를 폄하하고 부정하거나 피하고 숨기는데에 공을 들이기 보다 오히려 역경에 감춰진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역경을 극복하려 너무 많이 애쓰지 말고, 우리들 마음의 문을 열어두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메다 꽂기고 하고, 프로레슬링 식 표현을 쓰자면요, 기꺼이 함께 춤추듯 즐기자는 거죠. 그리고, 만약 역경을 자연스럽고, 별 다르지 않고 유익한 것이라고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때문에 맘고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올해가 찰스다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죠. 150년전 그는 진화론에 대한 책을 쓰면서 인간의 특징에 대해 서술하기도 했습니다. 다윈에 의하면, "가장 강한 종이 생존하는 것이 아니며 가장 똑똑한 종이 생존하는 것도 아니고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 것이다." 투쟁은 창조의 모태입니다. 다윈의 연구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것은 인간의 생존과 번식능력은 변화하고자 애쓰는 인간 정신력의 고군분투로 인해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변화한다는 것, 적응한다는 것은 우리 인류의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시험에 들기전에는 우리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역경이야말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자아와 능력을 일깨우도록 하고 우리 자신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는 거죠. 우리는 역경을 그저 험난했던 시간 이상의 무엇인가로 새롭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변화라는 차원에서 볼 수도 있겠지요. 역경은 그저 우리들이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던 변화에 불과합니다.

제 생각엔 우리들이 만들어왔던 가장 큰 역경은 정상 이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누가 정상이죠? 정상적인 것은 없어요. 보통이라거나 전형적인 것은 있어도 정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있다한들 이렇게 특색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을까요? (웃음) 그럴리가 없죠. 만약 우리가 '정상에 가깝다' 라는 것에 대한 가치관을 가능성과 잠재력 또는 약간은 위험할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많은 아이들의 능력을 끌어낼 수 있고, 그들의 귀중하고 값진 능력들을 사회와 함께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이 말하길, 우리가 사회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단 한가지는 사회에 도움이 되고 공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6만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은 노인들과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을 떠받들었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생존하면서 쌓아온 경험들이 집단에 공헌해온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쇠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지 않고 귀중하고 값진 존재로 여겼을 것입니다.

몇년 전, 어떤 식료품점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자랐던 펜실베니아주 북동쪽 부근 마을의 가게였는데요. 저는 한 가득 쌓아놓은 토마토 더미 앞에 서있었고요. 한여름이라 반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제 뒤에서,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음, 혹시 에이미 멀린스 맞나요." 전 돌아봤고, 어떤 나이드신 분이 계셨죠. 전 누군지 몰랐어요.

그래서 말하길, "죄송합니다만, 우리 만난적이 있던가요? 제가 만난 기억이 없어서요."

그분 말씀이, " 음, 아마 날 만난걸 기억 못할게야." "그니깐, 우리가 만난건 자네를 어머님 자궁에서 막 꺼내고 있을 때였으니까." (웃음) 아. 그 분이구나. 정말로 불현듯 생각이 났어요.

이분이 킨 선생님이구나. 엄마한테서 말로만 전해들었던 내가 태어난 날의 바로 그 분이었죠. 왜냐면, 보통 그렇듯이, 전 예정일보다 2주나 늦게 태어났는데요. 아무튼, 어머니의 담당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휴가를 떠나버리는 바람에 전혀 본 적도 없는 그 분이 저의 분만을 맡으셨던거죠. 그리고, 제가 태어 났을 때 종아리뼈가 없었고, 두 발은 안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이쪽발에 발가락 약간, 저쪽발에도 약간, 이런 상태라 이 낯선 분이 저의 이런 나쁜 상태를 전하는 심부름꾼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제게 말하길, "부모님에게 자네의 예후에 대해서 설명했어야 했지. 자네가 절대 걸을 수 없을거고, 다른 아이들만큼 운동능력도 갖지 못할테고, 다른 사람 도움없이 살지 못할 거라고 말이야. 근데 넌 날 완전히 거짓말장이로 만들었어." (웃음) (박수)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분은 제 유년시절 동안의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해서 보관해 왔다는 겁니다. 철자맞추기 대회에서 2등을 한 거라던가, 걸스카우트들과 행진한거, 할로윈 퍼레이드 같은거요, 대학 장학금 받은거나, 체육대회 수상한 것들,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서 수련의들이랑, Hahnemann 의대, Hershey 의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써왔던 거죠.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의 이름을 '미지의 인자 - 인간 의지의 잠재력'이라고 지었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의 이름을 '미지의 인자 - 인간 의지의 잠재력'이라고 지었답니다. 인간의 의지가 삶의 질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고 이것은 의학적인 예후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킨 선생님이 계속 제게 말씀하셨죠. 뭐랬냐면, "내 경험으로 봤을 땐, 자꾸 반복해서 얘기하지 않고, 그리고 거기다 도움도 최소화하고, 자기 의지대로 하게 놔두면, 아이들은 결국 스스로 해내더군."

그래요, 킨 선생님은 생각을 바꾼거였어요. 그는 의학적인 상황들과 그것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거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도 사고방식이 바꼈습니다. 만약 15살 시절의 저에게 의족을 실제 다리와 바꾸겠냐고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 그때 정상인처럼 살기를 간절히 원했거든요. 만약 지금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아닐지도 몰라요. 의족을 하고 경험해 온 것들 덕분에 안 바꾸겠다는 것이지, 그런 경험들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 바꾼다는 게 아니에요. 아마, 저에게 이런 인식전환이 일어난 까닭은 저를 구속하고 보호하려는 사람들 보다는 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일겁니다.

그래요, 정말 필요한 단 한사람은 여러분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하고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들 자신의 능력을 일깨우는 열쇠를 건넬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잘 받아들이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문을 열 수 있도록 열쇠를 건네는 것이야 말로 그들을 교육시키는 최고의 방법이지요. 스스로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에요. 사실, '교육(educate)'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educ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안에 고여있는 것을 밖으로 뻗어내는 것, 잠재력을 끄집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잠재력을 끄집어 내길 원하는 걸까요?

여기 한 사례가 있는데요. 1960년대에 영국에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는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선 streaming trial이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tracking 이라고 하는 건데요. 학생들을 A부터 D, 이런식으로 나누어 우열반을 정하는 거죠. A등급의 학생은 더 어려운 과목과 최고의 선생님들을 배정받게 됩니다. 이 때, 3개월간의 실험기간 동안 D등급의 학생들에게 A 등급을 부여하고는 너희들은 A등급의 우수한 학생이라고 말해 주었지요. 실제로 3개월 후에는 그들의 성적은 A 등급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실험의 한편에는 안타까운 면도 있는데요. A등급 학생들에게 D등급의 열등생이라고 속인 겁니다. 바로 3개월 후, 도중에 중퇴한 학생을 제외하고 남아있던 학생들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실험에서 중요한 것은 선생님들도 속였다는 점이에요.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바뀐 것을 전혀 몰랐지요. 누구는 우등생, 누구는 열등생이란 말만 들은 것이에요. 선생님들은 들은대로 학생들을 대하고 가르쳤던 거죠.

그래서, 제 생각에 진정한 장애는 억눌린 마음입니다. 억눌려서 아무 희망도 없는 마음이죠. 장점을 보지 못하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아이들같은 호기심이나 천부적인 상상력도 없는 상태 말입니다. 만약 대신에, 마음속에 희망을 품게 하고 자신과 타인의 내면의 장점을 볼 수 있고 호기심과 상상력이 가득하도록 힘을 북돋아 준다면 진정으로 우리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가치관을 마음에 품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존재의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시 한편 남겨드리고 저는 가보겠습니다. 14세기 페르시아 시인 Hafiz의 시인데요 제 친구, Jacques Dembois가 알려준 것입니다. 시의 제목은 "네 개의 단어만 아는 신" 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신을 알고 있다네, 혼 내지도 않고 하지 말란 얘기도 없고 오로지 네 개의 단어만 알고 계속해서 반복하네. Come dance with me - 이리 와서 나랑 춤추자" 이리 와서 나랑 춤주자.

감사합니다. (박수)
Posted by 커리어심리학자 서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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