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이 저물어가는 12월 28일 제주로 향했습니다.
아마 올 해의 마지막 공무가 될 여정이었습니다. 다른 일행은 모두 당일 저녁 비행기를 탔지만 나는 하루만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낯선 섬에 내 친구 이담이 있었기에.

다음 날 오전 여유있게 갈 수 있는 곳만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역시 섬은 바다를 보아야 합니다.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무렵, 나는 그 바다가 보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를 보고싶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본 환상적인 모습의 오름도 꼭 보아야 하지만 이번 일정은 여행아닌 여행이었으므로 바다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제주시 북쪽에서 서쪽으로 일주하였습니다. 제주 서북 해안 애월리의 <키친 애월>이란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난 카페라떼, 내 친구는 카푸치노.
진한 커피향이 주인장의 소박하고 환한 인상만큼 마음을 풀어줍니다. 알고보니 이 카페는 지역 언론에도 몇 차례 보도되고, 인터넷 상의 여행정보에도 자주 등장하는 꽤 유명한 맛집이었습니다.

이 카페 밖에 현무암으로 조각된 해녀 동상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 일하는 여성의 전형을 보는듯한 그 모습에 웬지모를 친근한 마음이 듭니다. 또한, 바람많은 섬 제주에서 일하는 해녀에게 부끄럽기만 한 하얀 나의 손이 슬그머니 감추어지기도 합니다.


해녀 동상을 지나 바다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맑고 푸른 바다가 그 맑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온통 현무암뿐인 해안은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그만 산보길을 만들어 놓았나봅니다. 수 백미터에 이르는 바다에 접한 길을 따라 걷노라면 빛이 다른 여러 개의 바다가 나타납니다. 참 신기합니다. 어떤 곳은 열대의 바다처럼 맑고 잔잔합니다. 또 다른 곳은 푸르디 푸른 짙은 빛을 뿌려줍니다. 마치 작은 풀장처럼 현무암 돌담으로 물을 가두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잠시 착각에 빠집니다. 내가 아주 먼 이국땅에 와 있는 듯한 느낌말입니다. '집나서면 개고생'이란 말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꾸 자꾸 멀리가고 싶어합니다. 먼 여행이 어디어디 가보았다는 말치장이라면 그 말은 사실일 것입니다. 나는 집에서 비행시간까지 총 3시간이면 올 이 곳이 왜 멀리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 사람들이 왜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여행은 어떤 자연과의 만남이자 잊고있던 자기 자신과의 만남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자기는 집에 두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올 때 여행의 참맛에 가까이 이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도 벅차게 일하지 않았지만, 그 바닷가가 좋았습니다. 웬지 모르게 글을 쓰거나 책을 쓰면 잘 써질 것 같았습니다. 집중하여 책을 쓰기 위해 산중사찰이나 인적드문 곳을 그려본 적이 있습니다. 혹 이 곳에 몇 달 머물면서 글을 쓰고 싶은 욕심도 납니다. 숙소는 대충 정하고 수시로 낚시를 하여 싱싱한 물고기로 끼니를 떼우면 돈이 많이들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하. 이렇게 마음 속으로 허풍을 떨어보는 것도 여행의 맛인가 봅니다.

빠르게 이동하면서 돌담으로 줄지어 서있는 하가리도 들러보았습니다. 갈대 밭도 지나면서 잠시 짬을 내어 지켜봅니다. 해발고도가 높아지자 도로의 눈이 녹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겁이 많은 나이지만, 친구는 익숙한 듯 거침없이 차를 몰아갑니다. 신비의 길에 차를 멈추어 중립으로 놓고 오르막길처럼 보이는 길을 그냥 흘러내려가 봅니다.

이렇게 때로는 호흡을 길게, 빠르게 하면서 거의 제주도의 4분의 1을 순환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제주의 진짜 멋있는 곳, 맛있는 곳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구석구석을 잘 아는 친구와 동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삐 돌아도 이틀 밖에 남지 않은 2009년을 다 정리하기엔 마음이 벅찹니다. 이틀 동안 내 마음이 차분하게 서둘렀으면 합니다. 그것이 올 한 해 바쁜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를 찾고 내년 여행을 떠나는 마음을 추스르는 올 해 나의 마지막 일이자 쉼표일 것입니다.
Posted by 서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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