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드레스를 재단하는 여자
                         - 드레스 디자이너 장세영




■ 방송일시 : 2007년 4월 19일 (목) 밤 11시 40분~12시3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정해상(외주:박하사탕), 작가 : 김수현



LA, 뉴욕 등 미국 내 5곳에서
<세영 부 쿠튀르>를 운영하고 있는
드레스 디자이너 장세영(36세)

브리트니 스피어스, 제니퍼 로페즈, 루시 리우
할리우드 스타들의 드레스가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된다.

파티장을 화려하게 수놓는 드레스!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여성들에게
드레스로 감동을 선사하는 장세영!

드레스 한 벌로 패셔니스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그녀만의 특별한 디자인이 시작된다.



▶ 할리우드 스타들이 사랑하는 세영 부‘s 드레스
유행과 패션의 도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와 비버리힐즈가 자리 잡고 있어 미국의 쟁쟁한 스타들이 패션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다. 그 유행 선도의 거리에서 드레스 한 벌로 미국 여성들을 사로잡은 한국인이 있다. 바로 드레스 디자이너 장세영(36). 브리트니 스피어스, 배우 루시 리우, 크리스티나 리치 등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그녀의 주 고객이다.

국내에 ‘퍼펙트웨딩’으로 개봉되었던 영화에서 주연배우 제니퍼 로페즈의 결혼식에
쓰였던 드레스 역시 그녀의 작품. 이 외에도 많은 스타들이 각종 시상식과 방송에 그녀의 드레스를 입고 나가면서 장세영은 미국에서 실력파 드레스 디자이너로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미국명 세영 부라는 이름을 걸고 드레스를 만든다. 심플하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드레스. 독특한 소재와 자신만의 재단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까다롭다는 미국 여성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그녀는 매장 오픈 일년 만에 200만 불이라는 매출을 올리면서 현재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녀에게 직접 옷을 주문할 정도로 성장했다.

▶ 소녀,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다
세영씨는 1986년, 국내기업의 미시간 주 지사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다. 3녀 중 맏이인 그녀는 대학에서 섬유와 사진학을 전공했고 뉴욕에서 한때 사진작가로 활동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16살부터 꿈꿔왔던 일은 사진작가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녀는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1999년, 자신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결혼식을 앞두고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찾을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고 들러리 복을 만들게 된 것.

그 이후 본격적으로 패션 공부를 시작했고, 지난 2002년 LA 멜로즈 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세영 부 꾸튀르> 라는 부티크를 열면서 패션사업을 시작했다. 신부 들러리를 위해 고정적인 흰색드레스에서 탈피, 다양한 색상의 톡톡 튀는 드레스들을 선보이면서 미국 드레스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매장을 오픈한지 5년만에 그녀는 LA를 포함해 뉴욕, 시카고 등 미국 내 5군데나 직매장을 열었고, 영국, 캐나다등 전 세계 17개 매장에서 그녀의 드레스를 파는 중견사업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드레스 디자이너로서는 TOP 20에 들 정도로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 드레스를 사랑하는 장세영-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파티드레스로 명성을 얻은 그녀가 요즘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는 웨딩드레스. 자신을
패션 디자이너로 만든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웨딩드레스다. 미국 내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나란히 웨딩쇼 무대를 가진 장세영씨. 심플하지만 그녀만의 돋보이는 디테일을
더한 웨딩 드레스들이 등장하며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디자이너로서 언제나 멈추지 않고 노력하는 그녀는 디자인의 영감이 필요할 때면 항상 벼룩시장으로 나선다. 이곳에서 1960-70년대 미국 빈티지 스타일의 중고 드레스를 사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 디자인하는 것도 그녀가 즐기는 작업. 패션은 유행의 흐름이 그 어떤 것보다도 빠르기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은 항상 드레스 디자인으로 꽉 차있다.

승승장구하던 그녀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지난해 자신의 매장에서 일하던 직원이
불합리한 소송을 제기한 것. 그녀는 소송을 준비하면서 드는 막대한 변호사 비용 때문에 미국내 매장 2곳을 문닫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최근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미국내 3대 TV 리얼리티 쇼 중 하나인, ‘프로젝트 런웨이’라는 프로그램에 오디션을 본 것.
‘프로젝트 런웨이’는 디자이너를 뽑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에서도 한 케이블 채널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원래 신인 디자이너를 뽑는 프로그램이지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기성 디자이너들도 도전을 하고 있다. 장세영씨는 미국 내에서도 이미 알려진 드레스 디자이너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그녀는 자존심을 버리고 출사표를 던졌다.


▶ 꿈을 선물하는 드레스 디자이너 장.세.영.
드레스는 모든 여성의 로망. 특별한 날이면 누구나 한번씩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예쁜 드레스를 입길 꿈꾼다. 이런 여성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세영씨는 매년 자선행사에 참석한다. 자선행사는 졸업파티에 돈이 없어 드레스를 못 사입는 여고생들에게 파티드레스를 선물하는 ‘프린세스 프로젝트’다. 장세영씨는 단순히 드레스를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날,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는 소녀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것이다.
패션을 사랑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늘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그녀들을 대변하는 디자이너 장세영. 각종 잡지사에서 촬영의뢰가 쏟아질 정도로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그녀는 세계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는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드레스 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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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극찬한 발레리노 김용걸



■ 방송일시 : 2007년 4월 12일 (목) 밤 11시 40분~12시3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이상운, 작가 : 허수빈





동양인 최초의
파리 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 김용걸!
무대를 압도하는 몸짓으로
세계의 정상에 도전한다.

1997년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 3등 !
1998년 파리국제무용콩쿠르 듀엣부문 1등 !
국내에서 정상의 자리를 버리고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계약직 견습생으로 시작,
단독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솔리스트가 되기까지.

발레의 본고장 ‘프랑스’를
땀으로 적시는 희망의 증거, 김용걸
삶이 묻어나는 춤을 추는
발레리노 김용걸의 무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 부산 섬 소년, 발레 타이즈를 신다!
여느 남학생과 다름없이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김용걸. 중학교 3학년, 평소 발레를 시키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발레학원을 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발레학원
가기를 싫어했다. 같이 발레를 하는 여학생들에게도 딱 붙는 타이즈를 입을 때면 놀림을 받기 일쑤였으니 학원가기를 싫어하는 것이 당연했다. 학원 갈 시간이 되면 도망가는 아들 손목을 잡고 학원으로 향했다는 그의 어머니. 어머니 때문에 억지로 시작한 발레가 어머니의 열정덕분에 발레인생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부산예고를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발레무대에 서기 시작한 그는 대학 졸업 후 1995년
국립극장에 입단 하고 단번에 수석 무용수 자리를 꿰찬다. 1997년 모스크바국제발레콩쿠르에서 동상 수상을 시작으로 1998년 파리국제무용콩쿠르 듀엣부문 1등을 차지하며 한국 발레 정상에 우뚝 선다. 파리 콩쿠르에서의 수상은 발레의 종주국 안방에서 이룬 쾌거 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 발레가 주목받기 시작한다.

해외 유학을 한 무용수들이 판치는 한국 발레 계에서 유학 한번 하지 않은 한국 토종 발레리노가 국내에서 정상을 넘어 세계에서도 인정받아가고 있던 찰나 이었다.

“나는 절대 쉽게 춤을 출 생각이 없다. 나는 기꺼이 힘든 일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기꺼이 어려운 일들에 부딪치고, 어렵고 힘든 일들을 기꺼이 해내고 싶었다.” (김용걸 인터뷰 中)


▶ 주목받던 한국의 별, 프랑스의 견습생을 자처하다!
2000년, 28살의 주목받던 한국의 별, 김용걸은 오로지 춤을 위하여 홀로 프랑스 땅을 밟는다.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춤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해외진출을 모색하던 중 프랑스 파리 오페라발레단에서 5개월 계약의 견습생을 뽑는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파리로 날아간다.
오디션에 합격한 그는 발레의 본고장 파리에서 동양인 남성 최초로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견습생이 된다. 한국에서 주인공만 맡으며 관객의 박수를 한 몸에 받다가 무대 밖 한쪽 구석에서 스페어타이어처럼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김용걸씨. 자신보다 10살 이상 어린 단원들 사이에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끼며 모두 돌아간 늦은 밤까지 계속 춤을 추었던 그는 5개월 뒤 정단원을 뽑는 오디션에 46명 중 1위를 차지, 2000년 7월에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정식 무용수가 된다.

발레단원의 95%가 파리발레학교 출신으로 외국인에게는 배타적인 파리 오페라발레단에서 그는 동양인 최초로 정식 단원이 되어 군무를 추게 된 것이다. 입단 22개월째이던 2002년, 바스티유 극장에서 공연한 <돈키호테>의 2막 1인무를 맡아 줄 무용수가 부상을 당해 대타로 기용된다. 이후 6차례의 공연에 더 출연했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비평가 ‘르몽드’, ‘피가로’의 찬사를 받았다. 그 해 군무와 1인무를 겸하는 ‘드미 솔리스트’로 승급, 발레단에서 입지를 넓혀간다.

마침내 2005년 12월, 승급시험을 1등으로 통과하여 동양인 최초로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솔리스트’가 된다.

“꼭 잊어야 하는 것이 있다. 내가 한국에서 주역 무용수 이었다는 것.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 상을 탔었다는 사실... ” (김용걸 인터뷰 中)

▶ 파리 오페라발레단 동양 유일의 ‘솔리스트’ 김용걸 - 다시, 날개를 펴다! 2007년 3월 26 / 31일.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돈키호테> 공연이 있는 날. 바스티유 극장의 분장실 한쪽에는 “KIM(김)”이라고 씌어진 종이가 붙은 의상이 걸려있다.
바로 <돈키호테> 제 2막에서 단독으로 무대에 서는 집시 역할을 맡은 김용걸의 무대의상이다. 지난 2002년 부상당한 무용수 대타로 기용되어 추었던 역(役)을 솔리스트가 된 후 다시 맡게 된 것. 공연 10분 전, 순서를 기다리며 몸을 푸는 김용걸씨의 표정에는 예전보다 더 긴장감이 감돈다.

이번 공연이 지난 10월 아킬레스건 사이의 뼈가 닳아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 후 첫 공연이기 때문이다. 연습 중간 중간 발이 붓지 않도록 얼음찜질을 하며 오늘의 무대를 준비했다는 그는 아픔을 겪은 후 삶의 무게를 표현할 줄 아는 춤꾼으로 무대에 선다. 무대 밖에서도 삶이 묻어나는 춤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선물하기 위해 그는 틈틈이 안무 구상 등 안무가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외로움과 좌절마저도 삶의 일부로 껴안을 줄 아는 그는 자신을 보고 희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는 오늘도 5월 5일 이후 ‘백조의 호수’ 프랑스 지방순회공연 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니진스키홀로 향한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닌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김용걸씨. 더 넓은 세계를 향한 그의 몸짓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목표가 뭐냐, 꿈이 뭐냐고. 그들은 당연히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에뜨왈이겠지 생각한다. 하지만..나의 꿈은 내 인생에서 에뜨왈이 되는 것이다.” (김용걸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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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역사를 다시 쓰다
                  베트남 드라마 제작자 김의성, 김세혁




■ 방송일시 : 2007년 4월 5일 (목) 밤 11시 40분~12시3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송철훈, 작가 : 양희정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히어로 김의성!
음반 제작, 연예인 엔터테인먼트 사업가 김세혁!
그들이 베트남 드라마 제작자로 다시 돌아왔다.
베트남 방송 사상 최초 100부작 드라마 제작!
방송 한 달 만에 30%에 가까운 시청률 기록!
한국의 드라마 제작 기술과 베트남 현지 스태프들이 만나
새로운 형태의 드라마가 탄생!
베트남 안방극장을 점령한 두 사나이 김의성, 김세혁씨.
TV 드라마의 불모지에서 새로운 한류 역사를 쓰고 있는 그들을 만나본다.





▶ 베트남 국민드라마를 탄생시킨 마이다스의 손 - 김의성, 김세혁
현재 베트남 호치민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100부작 드라마 <무이응오가이>. 농촌 출신의 여자 주인공이 베트남 쌀국수 사업을 통해 성공을 이룬다는 내용의 드라마이다. 베트남 정서를 꿰뚫는 내용으로 현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 이례적인 시청률 30%를 기록하며 베트남의 국민드라마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화제의 드라마 <무이응오가이>의 제작자는 놀랍게도 베트남 사람이 아닌 한국인들이다. 1996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주연 배우였던 김의성씨,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 동창생 김세혁씨, 그들이 베트남 국민드라마를 만든 주인공이다. 베트남에서 수입 드라마에 대한 규제와 심의가 엄격해지자 두 사람은 현지화 전략을 생각해냈다. 현지에서 우리가 직접 베트남 드라마를 만들자! 그들은 단순한 기획안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어로 쓰여 진 대본을 준비해서 호치민 방송국의 문을 두드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동시간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첫 시트콤에 이어 베트남 최초로 100부작 드라마를 제작, 방송국을 비롯한 각종 언론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으며 베트남 현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 <무이응오가이>의 성공비결!
<무이응오가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의성, 김세혁만의 특별한 전략이 숨겨져 있다. 첫 번째는 짜임새 있는 대본이다. 베트남 드라마지만 한국 작가들이 집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몇 번의 검수과정을 거쳐 베트남 정서에 맞는 드라마 대본이 완성됐다. 인물의 갈등전개며 남녀 주인공의 삼각관계 등 재미있는 소재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이다. 두 번째는 세트 촬영이다. 영화처럼 100% 현지촬영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던 베트남에 최초로 야외 오픈세트와 스튜디오 지은 김의성과 김세혁. 단시간에 많은 분량을 찍어 내기 위해 세트 촬영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이런 촬영 방식을 처음 접한 베트남인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 번째는 주요 스텝들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것. 배우와 제작에 필요한 인력은 현지에서 조달하지만 연출, 카메라, 조명 등 중요한 제작부분에는 한국인들을 투입했다. 베트남 드라마에 앞선 한국 기술을 도입하고 베트남 현지 스텝들에게 자연스럽게 선진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로써 <무이응오가이>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현지 드라마 시장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 한류의 새 역사가 시작 된다.
김의성과 김세혁은 최근 새로운 어린이 드라마 제작에 들어갔다. <무이응오가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어가기 위해 500부작 규모의 어린이 드라마를 제작, 방영키로 한 것이다. 일에 있어 철두철미한 두 사람은 배우 캐스팅 역시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도 직접 오디션을 보고 선택한다. 같이 참여하고 겪어봐야 그 나라 사람들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그 나라 사람들과 부딪치며 현지 문화를 이해하겠다는 두 사람. 그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드라마가 진정한 한류의 밑거름이 되길 원한다. 진정한 한류란 한국 이미지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대중문화산업 자체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 그것이 김의성, 김세혁씨가 생각하는 한류의 참된 모습이다. 이역만리 베트남 땅에서 진정한 한류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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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비벌리힐스를 사로잡은 남자
- 파티플래너 케빈 리


▶ 방송일시 : 2007년 2월 15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정해상(외주:박하사탕), 작가 : 김수현

미국 최대의 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
음반업계 최고 권위의 그레미 어워드!!

세계적 명성의 시상식장 파티를
10년 동안 총괄한 한국인이 있다.

영화배우 브래드피트와 제니퍼 애니스톤의 결혼식!
빌 클린턴 전 美 대통령의 전당대회 파티!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들과 LA의 유명 인사들을 매료시키며
미국 사교계를 꽃으로 장식한
파티플래너 케빈 리(53).

특별한 날,
미국 사람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하는 한국인
케빈 리가 준비하는 파티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 미국 사교계는 지금, 케빈 리의 마법에 빠졌다!

미국 최대의 시상식으로 손꼽히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래미 어워드는 별들의 잔치라고 불릴 만큼 영예로운 시상식이다. 이 화려한 시상식장을 10년 동안이나 총괄하며
아름다운 공간으로 연출한 주인공은 53세의 한국인 케빈 리. 할리우드 최고의 화제가
되었던 브래드 피트와 제니퍼 애니스톤의 성대한 결혼식도 케빈 리의 작품이다.
그 후 떠오르는 파티플래너로 자리매김한 케빈리는 안소니 홉킨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나등 이름만으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정상급 스타들의 결혼식을 주관하고,
주드로, 아놀드 슈워제네거, 빌 클린턴 등 각계각층 인사들의 다양한 기념일 행사를
도 맡았다. 하지만 파티플래너는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직업. 케빈 리는 파티플래너로 활동하며 꽃으로 미국 비벌리힐스를 사로잡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케빈 리가 20여 년 동안 운영한 la 프리미어 숍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벌리힐스의 내로라하는 대부호들까지 단골로 찾는 꽃집이다. 에디머피,
쟈넷잭슨, 비욘세 등 정상급의 스타들도 단골 고객이 되었다. 꽃 작품 하나의 가격이
수 십 만원에서 수 백 만원을 호가하지만 케빈 리의 가게는 연일 호황을 누리며
비벌리힐스를 대표하는 꽃집으로 자리매김 했다.

▶ 꽃집 종업원, 비벌리힐스 최고의 플로리스트 되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케빈 리. 그의 인생이 뒤바뀐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부터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그는 1979년,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주유소 꽃집 등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하루에 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을 정도.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파트타임으로 일 하던 꽃가게 주인의 권유로 플로리스트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항상 새로운 작품을 고객들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케빈 리의 철칙. 처음 플로리스트가 되어서부터 정상의 자리에 오른 지금까지 그는 한 번도 같은 디자인의 꽃장식을 하지 않았다. 파티가 있는 날이면 꿈속에서 조차 파티를 준비한다는 케빈 리.
그렇게 꽃집 종업원으로 일을 한 지 6년 만인 1986년, 드디어 자신이 운영하는 la 프리미어 숍을 열게 되었다. 현재 케빈 리는 비벌리힐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디자인하는 플로리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 파티를 사랑한 남자, 한국인 케빈 리!

촉망받는 플로리스트로 성장하던 케빈 리. 그에게 또 한번의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98년, 불후의 명곡 ‘마이웨이’를 부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장례식 장식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장례식과는 달리 망자의 새로운 인생을 축복하기 위해 화사한 분위기로 꾸며진 프랭크 시나트라의 장례식은 CNN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 될 만큼 화제가 됐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장례식을 계기로 콧대 높은 비벌리힐스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파티플래너로 성장하게 된 케빈 리.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한 번 인연을 맺은 고객들의 생일파티를 일일이 챙겨주는 자상함까지 겸비하고 있다. 반신반의 하며 파티를 맡겼던 할리우드 스타와 유명 인사들도 케빈 리의 ‘진심’앞에 이제는 그와 친구가 되길 원한다.
먼 타국에서 화려한 사람들과의 인맥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고국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 요즘 플로리스트를 꿈꾸는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케빈 리.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미국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제 2의 케빈 리가
나올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 꽃을 사랑한 남자, 생애 최고의 순간을 디자인하다.

최근 케빈 리가 디자인한 결혼식은 비벌리힐스 최고 부호들의 전용결혼식장이라는
힐튼 호텔에서 치러졌다. 하객이 수 백 명에 이르는 이 거대한 결혼식에 들어간 비용만
7억 원. 평범한 3개 홀이 케빈 리의 손에 의해 최고급 유럽풍의 결혼식장으로 탈 바꿈
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신혼부부의 행복한 앞날을 축복하기 위해 온통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결혼식장. 이렇게 케빈 리가 진행한 행사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파티장을 장식하는 데만 30억 원의 비용을 들인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주관한 대부분의 행사는 부르는 게 값. 고객의 배경과 상황에 맞춰 행사를 기획하기 때문이다. 13세가 된 유대인 소년의 성인식도 케빈 리의 손에 의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기 위해 어느 때 못지않게 신중하게 파티를 준비했고, 성인식은 최고의 순간으로 마무리 되었다.
꽃이 생활의 일부인 미국 사람들에게 삶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꽃의 마술사 케빈 리.
고객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케빈 리의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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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공중보건 지킴이
- 수의사 김세민


▶ 방송일시 : 2007년 2월 8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김상우, 작가 : 허수빈

 

광견병으로 매년 150명 사망.
스리랑카는 광견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스리랑카 광견병 퇴치의 최일선에 나선 한국인 김세민씨.
광견병퇴치와 조류인플루엔자 예방책 마련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스리랑카의 농축산부장관 직속 수의 보좌관으로 임명 됐다.

공중보건의 불모지 스리랑카에서
수호천사로 통하는 30세의 한국인 수의사 ‘닥터 김’

사람과 동물의 공존을 위해 땀흘리는
그의 인술현장을 동행한다.

■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나라 스리랑카
             스리랑카의 광견병과 싸우는 한국인 수의사 ‘김세민’

인구 2천만명의 스리랑카. 개는 인구수의 5배가 넘는다. 그 중 대부분이 접종과 관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떠도는 유기견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유기견들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개가 갖고 있는 갖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광견병이다.
매년 150명이 광견병으로 사망하는 스리랑카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국가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살처분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살처분은 역효과만 냈을 뿐
개체수나 광견병으로 인한 피해는 줄어들지 않아 실패했다. 스리랑카 전역을 누비며
수의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수의사 김세민씨.2003년 스리랑카에서 수의보좌관으로 일을 시작 한 이래로 광견병퇴치에 앞장서던
김세민씨는 2004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개들에게 백신접종을 하고 중성화 수술을
실시했다. 중성화 수술은 근본적으로 개체수의 증가를 억제하고 사람과 개들의 건강한
공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 만능 수의사 ‘닥터 김’이 최고야!
                            연막소독기를 둘러맨 수호천사 ‘김세민’

수의사 김세민씨는 동물 치료뿐 아니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스리랑카 유일의 중앙동물병원의 수의사에게 수술법을 가르치고 수술 후
모니터를 해주는 것은 물론 올바른 약품 관리를 위해 약품 보관실의 관리법까지 알려줄 정도로 세밀한 부분에도 신경을 쓴다. 2004년 쓰나미가 스리랑카를 뒤덮었을 당시에도 식수관리는 물론 시체 운구 등의 궂은 일 또한 ‘김세민 수의사’의 몫이었다. 공중보건의체계를 잡는 것이 곧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 말하는 김세민씨.
일주일에 한번씩 연막소독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구석구석을 돌며 일일이 소독을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이 사랑하는 만능 수의사 닥터김! 훗날 도움의
손길 없이도 쓰리랑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그저 작은 힘을 보태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 스리랑카 정부는 닥터김이 필요하다!
               ‘스리랑카 농축산부장관 직속 수의보좌관’ 김세민

김세민씨는 2000년 ‘청소년 교류프로그램’으로 몽골 방문 시 주사기를 재활용하는 열악한 개도국의 현실과 국제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 후 국제협련단(KOICA)에 군 대체복무 요원으로 지원하여 2003년 스리랑카 ‘농축산보건청 수의보좌관’으로 일을 시작했다.
조류독감으로 전 세계가 들썩일 때 조류인플루엔자에 무방비로 노출 된 스리랑카에
대비책을 마련한 것도 김세민씨였다. 조류인플루엔자를 확인할 기술이나 장비가 없어서 진단 조차 할 수 없던 때 김세민씨가 나서 한국으로부터 진단기술과 진단키트를 무상 지원 받았다. 김세민씨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외국인 최초로 2005년 농축산부장관
표창과 함께 수의보좌관으로 임명된다. 2006년 1월, 전역을 앞둔 김세민씨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막 김세민씨의 도움으로 공중보건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스리랑카
정부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한국대사관에 김세민씨를
스리랑카로 재파견 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리하여 스리랑카로 다시 돌아온
김세민씨는 본격적으로 ‘농림부 직속 수의보좌관’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 2007. 1. 18
      스리랑카 대통령궁에서 ‘광견병 통제센터’마련을 위한
          프리젠테이션 실시

광견병 퇴치사업을 전국적으로 벌이기 위해 프로그램의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스리랑카.
스리랑카는 현재 김세민씨의 제안으로 광견병 예방 접종이나 수술은 물론 수술 후 입원, 유기견 보호, 개를 기를 때의 주의사항 교육까지 가능한 스리랑카 최초의 ‘광견병 통제센터’설립을 추진 중에 있다. 광견병 통제센터의 건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인 부지와 시설마련을 위해 스리랑카 정부를 설득하고 지원을 이끌어 낸 것도 김세민씨였다.
부지와 시설마련뿐 아니라 시설 운영비 등 적극적인 예산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대통령궁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을 요청했던 김세민씨. 드디어 1월 18일.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광견병 통제센터’마련을 위한 대통령궁 프레젠테이션을 실시, 앞으로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김세민씨의 활약상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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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편, 브라질이 주목한 사업가
반지의 제왕 이재호

▶ 방송일시 : 2007년 2월 1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이상운, 작가 : 양희정  

2004, 2005년 브라질 최고의 체인점 선정!
브라질 전체 판매성장률 3위!
연 20-30% 성장률 달성!
2006 브라질 사업모델 선정!!
연매출 3600만 달러!
브라질 전역에 110개의 가맹점을 개설한 기업 진진&모라나!
중국음식과 액세서리로 브라질을 점령한 반지의 제왕,
이재호 사장의 성공스토리를 들어본다!



 

▶ 브라질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다. 진진&모라나

브라질의 <진진&모라나>는 중국음식 가맹 사업에 이어, 여성 액세서리 가맹사업까지
성공시키며 2004, 2005년 브라질 최고의 체인점으로 선정되는 등 가장 주목받는 기업중 하나다. 현재 브라질 전역에 진진& 모라나가 건립한 가맹점수는 무려 110여개로,
특히 액세서리 전문점 모라나는 창업한지 4년 만에 70여개의 가맹점을 만들어내며 가장 빠르게 성장한 브랜드로 손꼽힌다.

이 놀라운 결실을 일군 사람은 바로 43세의 한국인 이재호씨. 90년대 초반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외식 산업과 여성들의 패션관련 사업 분야가 전망이 밝다고 생각하고 가맹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재호씨의 예상은 적중했고 사업을 시작한지 15여년 만인 지금, 연 매출 3600만 달러를 만들어내는 기업 진진&모라나를 탄생시킨 것이다.

▶ 고객의 마음을 읽으면 성공이 보인다.
피부도 생김새도 다른 이민족이었던 이재호씨가 브라질의 체인 사업 시장에 뛰어든
지 불과 10여 년 만에 큰 성공을 거둔 데는 남다른 노력과 비법이 있었다.
바로 ‘고객의 마음을 읽는 서비스와 고객 만족 마케팅’이다.


쳇째,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이재호씨는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매장 인테리어부터 판매 될 제품을 선정했다. 그래서 여성액세서리 전문점 모라나 매장에는 유리진열장이 없다. 반지, 목걸이, 머리핀 등 모라나의 모든 제품은 고객들이 직접 만져보고 착용해 본 뒤 선택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심지어 시간대 별로 고객의 유형과 연령층까지 분석해 그에 맞는 제품 진열하는가하면, 지역에 따라 선호되는 제품이 무엇인지를 조사해 그에 맞는 물건을 지점에 공급한다.

둘째, 최상의 품질을 제공한다.
 
진진에서는 최상의 재료로 만든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맛 볼 수 있다. 이재호씨는 신선한 재료들을 40여개의 각 지점에 공급할 뿐만 아니라 가맹점을 개설한 사람들에게 한 달 간 요리 교육을 받게 해 모든 지점의 음식 맛을 동일하게 유지한다.

그런가하면 모라나는 신상품에 대한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주 20여개씩
새로운 상품이 만들어 내고, 뛰어난 디자인과 좋은 제품을 확보하기 위해 일 년에도
여러 차례 한국과 브라질을 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셋째, 고객이 준 이익은 고객에게로!
모라나는 얼마 전부터 판매수익금의 10%를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기관인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고객에 의해 발전하고 성장한 회사 인 만큼 이제는 그 이윤을 사회와 함께 나눠야한다는 것이 모라나&진진 기업의 방침이다. 좋은 뜻에 동참해 많은 유명 연예인들이 보수를 받지 않고 기꺼이 모라나 제품의 모델이 되어 줘,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 브라질을 넘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재호씨의 꿈은 진진&모라나가 브라질을 넘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2007년,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을 논의한데 이어 곧 유럽시장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불혹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재호씨는 얼마 전부터 MBA 경영대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모라나&진진이 브라질을 넘어 세계의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가장 선두에서는 이끄는 경영인부터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꿈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발걸음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성장하는
이재호씨의 힘찬 내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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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왕 김영완의
굿모닝 LA


▶ 방송일시 : 2007년 1월 25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송철훈, 작가 : 박미연

 

미국 내 햄버거로 대표되는 ‘정크푸드’는 가고,
‘씨푸드’로 대표되는 ‘웰빙푸드’가 뜨고 있다!
성장률이 높아지는 미국 해산물 시장.
해산물에 있어서만큼은 절대강자인 일본인업체들 속에
당당히 맞서는 한국인 업체가 있다.

LA 요식업체 선정 “BEST Company of the year”수상
미국 각지에 거래식당 600여개
취급 어종 300여종
한 해 매출 4천만불


바로 ‘오션 프레쉬 피쉬’를 이끄는 한국인 ‘김영완’ 씨가 그 주인공이다.
비버리힐즈의 까다로운 고급레스토랑부터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라스베가스까지.
20년간 오로지 생선을 향한 김영완씨의 집념과 열정을 만나보자.

■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일본인’..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국인’ 김영완!

전 세계적으로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 요즘, 미국시장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이
바로 회와 초밥으로 대표되는 씨푸드! 거기에 미국에 진출한 일식 요리사들의 노력이
더해져 미국 내 일식집 1만개로 바야흐로 일식 전성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날로 성장해 가는 거대한 시장임을 미리 꿰뚫어 본 한국인 생선장수 김영완씨!
일본인 주도미국 해산물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배타적이고 까다로운 일식 요리사들의 마음을 여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사업 초기, 싱싱한 생선을 들고 일식집을 찾았지만 김영완씨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일본인이 아니면 나가라”는 말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고객들에게 파는 것은 단순한 생선이 아니라
‘오션 프레쉬 피쉬’라는 자존심이고 ‘코리안’이라는 자부심이기에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사업 시작 23년 만에 고급레스토랑의 콧대 높은 일식 요리사들을 한국인이 운영하는
‘오션 프레쉬 피쉬’로 줄서게 한 비결은 무엇일까.

■ 공부를 하기위해 선택한 생선장수
            끈기로 얻은 별명 ‘김조기’!

1980년, 공부를 목적으로 가방하나 짊어지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영완씨는 학비 마련을 위해 청소부, 정원사, 도넛 가게 점원, 주유소 등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중국인 생선수입회사에서 우연히 일한 것을 시작으로 수산업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세일즈맨 시절, 조기의 조리법조차 모르던 한인 타운의 미국 사람들에게
끈질기게 조기를 팔러 다녀 ‘김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 시장을 돌며 상인들과 직접
부딪힌 시간들은 해산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던 김영완씨에게 수산물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는 공부의 초석이 되었다. 생선을 팔며 흘린 땀방울의 맛을 알았기 때문일까.
1983년 트럭한대로 미국을 돌며 생선 장사를 시작한다.
먼 타국 땅에서 생선장수의 길을 선택하게 했던 김영완씨가 발견한 미국 해산물 시장의 블루 오션은 무엇이었을까.

■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변함없는 ‘신입 사장’ 김영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새벽시장을 여는 김영완씨. 직원들보다 한 시간 앞선 새벽 3시에
출근하여 회사의 일과가 끝난 후 모두가 퇴근한 후 회사 뒷정리를 마쳐야 그의 하루도
끝이 난다. 주문량을 체크하고, 손수 생선을 다듬고, 일과 후 작업장 청소까지 김영완씨
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사장이 직접 현장에서 부지런을 떠니 ‘오션 프레쉬 피쉬’에 대한 믿음이 커지고,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고 고객들은 입을 모은다. 사업초기
“오션에 가면 내가 원하는 싱싱한 생선을 구할 수 있다. 영킴 믿을 만하다”
입소문이 오늘 날의 ‘오션 프레쉬 피쉬’를 만들었음을 알기에 김영완씨는 어김없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작업장으로 향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그의 특별한 24시간
덕분에 LA 사람들은 언제나 싱싱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미국 식탁의 싱싱한
해산물을 책임지는 김영완씨의 생생한 일상을 들여다본다.

■ ‘선어(鮮魚)’를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간다.
         미국 최고의 수산 왕국을 꿈꾸는 김영완!

냉동이 아닌 선어를 선호하는 미국 해산물 시장의 흐름을 꿰뚫고 사업에 뛰어든
김영완씨는 무서우리만치 생선의 질에 집착한다. 가격이 아닌 생선의 질로 고객을
설득하는 것이 20년간 지켜온 변함없는 그의 철칙! 고객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일본, 하와이, 캐나다는 물론 아프리카와 멕시코의 오지까지 30여 개국에서
300여종의 해산물을 수입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산지에서 막 잡아 올린 생선을 현지
지점의 직원이 경매를 통해 구입, 24시간 내에 고객에게 전하기 위해 비행기를 통한
생선 공수 대작전이 날마다 펼쳐진다.
이제 LA를 넘어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시장인 라스베가스까지. 전 미지역에
‘오션 프레쉬 피쉬’의 깃발을 휘날릴 그 날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김영완씨의 도전 인생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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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타조왕
- 배효섭


▶ 방송일시 : 2007년 1월 18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김정수, 작가 : 김수현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타조는, 영어‘오스트리치(Ostrich)’대신
우리말
‘타조(Tajo)’ 로 통한다.
‘타조’라는 브랜드로 뉴질랜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자랑스러운 한국인 배효섭 씨 때문이다.
뉴질랜드 타조고기 시장의 99%를 장악하고 있는 배효섭씨!
현재 동양인 최초로
뉴질랜드 타조협회장 까지 맡고 있는
타조왕, 배효섭씨를 만나본다!


▶ 뉴질랜드인들에게
            영어 ‘Ostrich' 보다 친숙한 우리말 ‘타-조(Tajo)’
                               - 배효섭의 뉴질랜드 타조시장 개척기

뉴질랜드 사람들은 타조고기를 영어 ‘Ostrich' 대신 우리나라 말 그대로 ‘타조(Tajo)'라고 부른다. 배효섭씨가 우리말 ‘타조’를 상표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타조 오스트리치'라는 고유의 브랜드를 만들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한지 9년여. 이제 사람들은 고급레스토랑에서도, 대형 마트에서도 ‘타조 오스트리치’를 찾는다. 현지의 대형 마트에서 판매되는 소고기의 가격은 1kg당 한화 1만 8000원, 타조고기는 약 3만원 정도. 뉴질랜드에서 타조고기는 고급육으로 통한다. 배효섭씨는 고가에 판매되는 타조고기를 단골 메뉴로 만들기 위해 맨몸으로 뛰었다. 그리고 현지인들조차 외면한 타조고기 시장을 떠오르는 사업으로 탈바꿈 시켰다. 배효섭씨의 타조고기는 마트에만 납품되는 게 아니다.
최고급 레스토랑에 직접 개발한 다양한 타조 요리들을 소개해 고객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이르렀다. 그가 개발한 메뉴만도 타조 버거, 타조 스테이크, 타조 스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타조 버거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좋아하는
인기 메뉴로 자리매김 했다.
뉴질랜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심에 바로 자랑스러운 한국인, 배효섭씨가 있다.

▶ 1인 多역을 소화하는 타조박사!

뉴질랜드 중의 뉴질랜드로 불리는 유라웨라 국립공원. 이곳에 30여만 평 규모의 캐디쉬
농장이 있다. 바로 배효섭씨가 운영하는 뉴질랜드 최대 타조 농장이다. 그가 사육하는
타조만 해도 3천여마리! 배효섭씨는 이 거대한 농장을 단 4명의 직원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기계화 되어 있는 캐디쉬 농장. 이곳에는 배효섭씨의 손이 거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알을 부화시키고 갓 태어난 타조들을 사육하는 일에서부터 농장을 관리하고 타조고기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그가 관리한다. 타조에 관한 거의 박사가 된
배효섭- 그는 농장을 운영하며 또 다른 수익 모델을 연구하던 중 농장을 관광상품으로까지 개발, 관광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 해 캐디쉬 농장을 찾는 관광객들만 수천 명.
뉴질랜드 현지인에서 일본인, 한국인들까지 있다. 배효섭씨는 농장을 방문한 관광객에게 농장 투어는 물론 타조고기를 시식하게 했다. 반응은 성공적!
하지만 그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정신,
                   뉴질랜드에서 꽃 피우다!

한국에서 증권회사의 이른바 잘나가는 채권펀드매니저로 일했던 배효섭씨. 그는 9년 전, 새로운 일을 찾아 돌연 뉴질랜드행을 택했다. 새로운 나라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타조사업. 당시 뉴질랜드 내에서 타조 축산업은 사양산업이었다. 현지인들조차 판로를 찾지 못해 타조 농장을 포기하고 있었다. 처음 그가 타조 농장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의 선택을 만류했다. 차라리 소나 양을 키우라고 했다. 하지만 배효섭씨는 타조가 뛰어난 생산성과 질병으로부터의 안전성, 맛과 영양을 모두 갖춘 미래의 육류라는 확신을 가지고 타조사업에 과감히 도전장을 냈다. 현재 그는 뉴질랜드타조고기의 99%를 공급, 생산량의 70%이상을 유럽, 미국 등지의 해외로 수출하는
기업을 일군 장본인이다.
뉴질랜드 국민당의 대표인 존 키씨는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경제를 튼튼하게 만드는 배효섭과 같은 사업가들을 적극
후원한다.”
며 그의 성공에 박수를 보냈다.
뉴질랜드의 경제발전에도 큰 영향을 준 배효섭씨. 그는 현재 뉴질랜드 타조협회에서
동양인 최초로 협회장으로 활동하며 현지 정재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다.

▶ 타조고기 시장의 부활,
                      그 중심에 선 배효섭!

뉴질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이민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배효섭씨.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었다. 사업을 시작한지 5년 만에 투자한 자본이
모두 바닥나자 그는 마케팅에 승부수를 띄웠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럭비구장, 공원 등을 찾아 타조 고기 시식회를 열며, 타조고기를 알렸다. 대형 마트와
고급 레스토랑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시식회를 열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결과는 대성공! 특히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이 모이는 대형마트에 ‘타조 오스트리치’를
납품하는 것은 판매와 홍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조금씩 알려
지게 된 타조고기는 뉴질랜드의 최고급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현재 레스토랑에서 판매되는 음식 중 고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메뉴가 되었다.
사업이 성공 궤도에 오른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배효섭씨. 그는
갑자기 주문이 들어온 물건을 직접 배달하기도 하고, 새로운 거래처를 직접 찾아가
‘TAJO(타조)’를 홍보한다. 또 뉴질랜드 사람들의 입맛을 공략하기 위해 마케팅을
전문으로 하는 현지인을 고용해 메뉴를 개발하는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배효섭씨의 하루는 오늘도 ‘타조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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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나의 무대
- 미술 총감독 한유정


▶ 방송일시 : 2007년 1월 11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황범하, 작가 : 허수빈

 

영화의 꿈이 시작되는 세계적인 영화 제작소 미국 할리우드.
할리우드는 배우나 감독 외에도 수많은 전문가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진검 승부를 펼치는 세계 최고무대다.
미술 총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은 세트 제작에서부터
작은 소품배치에 이르기까지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공간을 연출하는 영화제작 전문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미술 총감독 중 동양인은
불과 5% 미만에 불과하다.
그 엄격하고 냉혹한 할리우드의 벽을 넘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미술 총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유정씨(34).
할리우드에서 제작하는 영화, TV쇼, 광고 등의 미술 총감독으로 활동한지
9년째가 된 그녀는
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 ESPN, MTV, NBC 등
유수의 제작사와 함께 일했다.
앞으로 5년 안에 미술 총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 세계 TOP 10에
들겠다는 당찬 계획을 갖고 있는
한유정의 할리우드 도전기와
할리우드를 무대로 펼치는 그녀의 활약상을 따라간다.


▶ 할리우드의 토종 한국인 미술 총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 한유정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손을 거친다. 그 중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공간을 창조하고 연출하는 총책임자가 바로 프로덕션 디자이너, 미술 총감독이다.
20년 전만해도 할리우드의 여성 미술 총감독은 극소수였을 뿐더러 특히, 외국인이
할리우드에 입성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런 미개척지에 10년 전 도전장을 내밀고 당당히 할리우드에서 유일한 한국인 미술
총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유정씨. 교포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조기 유학파도 아닌
그녀가 자신의 한글 이름 ‘한 유 정’을 당당히 내걸고 할리우드의 냉혹하고 엄격한
무대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리더십과 섬세한 미적 감각, 그리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도전정신, 자신감 때문이었다.

★ 할리우드는 겉보기에 그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화려한 꿈의 무대처럼 비춰지지만,  그 실상은 치열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항상 나를 긴장하게 하며 나태해 지지 않게 잡아주는 그 할리우드의 전쟁터가 삶의 원동력이다. ★                        
-한유정 인터뷰 중-

▶ 할리우드에서 고교시절 꿈을 이루다.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 광고, TV쇼 등의 미술 총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
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본래는 연극이나 오페라의 무대 디자이너가 꿈이었다는
한유정씨. 고교시절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었던 때만 해도 한국의 무대 디자인 분야는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한국의 대학에서 실내 환경 디자인과를 졸업, 1년간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하며 악착같이 포트폴리오를 준비한 것은 바로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무대, 즉 미국으로 떠나오기 위함이었다. 직장을 다니며 1년간 매일 밤샘 작업했던 포트폴리오가 마침내 미국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무대 디자인 석사 과정에 입학허가를 가져다주었다. 유학시절 덩그러니 작업실에 홀로 남아 도면을
그리고, 무대를 세우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꿈에 매일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에 늘 행복했다.

★ 유정은 이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훌륭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미술 쪽의 이력, 시각적 역량, 상상력으로 봤을 때 그녀가 그 일을 분명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유정의 스승 ‘단 월런’(연극과 조교수)-

▶ 최고의 배경과 공간을 창조하는 미술 총감독, 한유정

대학원 시절, 연극과 대학원 학생들에게 의뢰받은 무대 디자인을 해주며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던 한유정씨. 당시 그녀에게 작품을 의뢰했던 대학원 학생 중에는 영화 프로듀서가 있었다. 뛰어난 미적 감각과 순발력, 그리고 팀을 이끄는 리더십이 뛰어났던 그녀는 대학원에서 만난 영화 프로듀서의 발탁으로 1999년 정우성, 고소영 주연의 <러브>미술 총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을 맡았다. 이 후 무대 디자이너가 아닌 미술 총감독의 길을 걷게 됐다. 엔디 가르샤, 제임스 코번, 믹 제거 등 유명 스타들이 출연했던 영화에서부터 인디영화에 이르기까지 수십 편의 영화제작에 참여한 그녀는 특히
저예산으로 최고의 배경과 공간을 창조해내는 유능한 미술 총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 그녀의 능력은 2002년 선댄스에 출품됐던 저예산 영화, 베터 럭 투모로우
(Better Luck Tomorrow)의 신인감독이 일약 메이저급 할리우드 감독으로
성장하는데 숨은 공로를 했다.

★ YJ(유정)과 일하는 것은 매우 즐겁다.
그녀는 몇 가지 요소를 끄집어내어 마치 백만 불짜리처럼 공간을
만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 ‘게리파머’(카메라 감독) -

▶ 곧은 길 보다는 굽은 길로 간다.

가족을 떠나온 지 10년. 미국 땅에서 힘들 때 마다 그녀를 붙잡아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마라, 미래만 생각해라’라고 늘 말씀해 주신 어머니였다. 한국이
그리울 때마다 한국음식과 드라마를 보면서 향수를 달랜다는 한유정씨. 한국의 전통
문양과 한옥에 관심이 많은 그녀는 언젠가 할리우드에 한국의 이미지를 심는 것이
꿈이기도 하다. 곧은 길 보다는 일부러 굽은 길을 택해, 장애물을 하나씩 넘으며 더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아가는 삶이 더 즐겁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 자신이 만들고 싶어 하는 공간에 대한 욕심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용기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한유정씨는 앞으로 5년 안에 할리우드 미술 총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 TOP 10에 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Posted by 서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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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유혹하다
- 바이올리니스트 제니 배


▶ 방송일시 : 2006년 12월 28일 (목) 밤 11시 40분, KBS 1TV
▶ CP : 김영묵
▶ PD : 이낙선, 작가 : 양희정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인 음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제니 배.
루치아노 파바로티, 엘튼 존, U2등 세계적인 거장들과의 협연!
‘독일 월드컵 결승전, 베를린오픈페스티벌의 피날레 장식’!
‘노벨 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 오프닝 공연’!!

26살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제니 배가
세계인의 마음을 매혹시킨다.
클래식과 전자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 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 속으로 들어가 본다!


▶ 미모의 바이올리니스트,
                          세계를 유혹하다!

‘바네사 메이’로 대표되던 전자바이올린계에 무서운 신예가 등장했다. 주인공은 유럽을
주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스물여섯의 한국인 제니 배. 그녀는 줄리아드
음대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0년, 한국에서 열린 평화콘서트에서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의 협연을 계기로 세계무대에 얼굴을 알렸다.
그 후, ‘백혈병 환자를 위한 호세 카레라스 갈라 콘서트’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초청되어
공연을 했다. 뿐만 아니라 ‘2006 노벨평화상 수상자 회의’의 오프닝 무대와
'2006 독일 월드컵' 결승전을 축하하는 콘서트 '베를린 오픈 페스티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등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굵직한 무대에서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성장하고 있다.

▶ 새로움을 향한 끝없는 도전,
                             정상을 향해 달리다!!

제니 배는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나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하는 클래식협연뿐만 아니라 주페로, U2, 폴영 등 세계적인 팝아티스트들과의 협연으로 대중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클래식과 전자음악을 하나로 아우르는 연주는 세계무대에서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런 그녀가 또 한번 새로운
장르로의 도전을 준비 중이다. 바로 한국의 소리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
오랜 시간의 외국생활에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는 제니 배는
국악과 전자바이올린을 접목, 동양의 고전적요소와 서양의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진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으로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역할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매일같이 연습에 매진하는 그녀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된다!

▶ 평화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노벨평화위원회 홍보대사로 위촉되다!

제니 배는 얼마 전 노벨평화위원회의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참석한 노벨수상자연석회의에서 결정된 ‘평화 헌장’을 세계 곳곳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지난 11월 치러진 노벨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감동적인 오프닝 무대를
선보인 제니에게 주최 측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인권과 평화가 필요한 사람들을 돕자는 의의를 알리는데 제니의 음악이 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평화사절단으로 임명된 그녀는 첫 무대로 노벨평화위원회에서 주최한 자선공연에
올랐다. 자신의 음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오랜 꿈을 조금씩 실현해 가고 있는 그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제니 배!
한국인 최초의 그레미어워드의 수상자가 되겠다는 당찬 한국인, 그녀를 만나본다!

Posted by 서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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